미술치료의 역사
미술치료의 역사는 옛날에는 얼음이 덮였던, 그리고 뒤에 빠르게 녹은 시내들이 흘러들었던 강의 역사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실제로 지난 50년이 경과하면서 미국의 미술치료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특성이 있었다. 그 수준이 위험한 범람의 수준에 도달한 적은 없었지만 때로는 자신의 제방들을 넘어서려고 위협하였으며, 훈련과 실무의 기준을 강화하면서 제방들을 유지하기 위해 신속히 작업해야 했다.
미술치료 분야는 모든 종류의 환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 직업에서 많은 발전들의 개화를 인정하면서 미술치료에 대한 회의적이던 태도들이 누그러졌고 온화한 분위기가 되었다. 또한 사회적인 풍조로 인한 압력들이 미술치료 발전의 과정과 속도를 정했다.
현실적으로 필요하지 않더라도 창작은 자발적인 충동을 수반하며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다. 실제로 유아들도 아주 쉽게 표시를 만든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종인 원숭이와 침팬지도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것을 좋아하며, 때로 창작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먹거나 교미하는 것을 뒤로 미룬다.
미술치료의 기원들은 많은 다른 자연 영역에 있다. 새로이 정의된 직업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미술치료의 뿌리들은 고대이며 전 세계에 있다. 동굴의 벽에 동물들을 그리거나 다산의 상징을 새긴 선사 시대 미술가들, 미이라가 들어 있는 관 위에 보호의 상징을 그린 이집트 화가들, 모래로 만다라를 창조한 티베트 불자들, 의식용 가면을 만든 아프리카 조각가들, 성상을 만든 비잔틴 화가들 이들 모두가 현대의 미술치료라는 분지로 흘러간 하나의 힘찬 흐름을 대표한다.
이런 근원은 무의식 자체처럼 인간의 필요조건의 일부로서 항상 존재한다. 신앙을 통한 치료와 부두교의 우상들과 같은 것들의 이면에 있는 ‘마술적 생각’이 단순히 고대의 유물이거나 원시적 문화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성적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의 부분이며 우리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영원히 우리 모두의 내면에 실제로 존재한다. 이것은 ‘가짜 약을 투여해도 실제로 병세가 호전되는 심리 효과’와 성공하고 있는 심신일체적 치료 방법들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옛날에도 치료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원시 사회에서 의식을 위하여 신체를 장식하는 것, 의상, 가면, 소도구, 신전을 장식하는 것 등을 한 데서 시각 예술을 알 수 있다. 미술 제작과 이미지 마술의 보편성 때문에, 상징적인 양식과 관련된 힘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치료사들은 자신들의 작업 중에 다양한 예술 양식을 사용했다.
이렇게 뿌리가 깊이 정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위해서는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무의식이란 개념에 매혹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도 치료에서, 치료를 위하여, 치료로서의 미술을 사용하는 많은 방법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의식은 프로이트와 융의 심층심리학 뿐만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들 그리고 프랑스의 상징주의자들의 시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정신분석학자들이 꿈의 신비를 연구하기 시작할 때, 서양 미술가들은 내면세계를 표현하려는 이유 있는 듯한 목적을 위해 외면세계의 표현을 포기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가면이나 일본의 판화와 같이 인간의 영혼을 더 순수하고 덜 구속되게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심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처럼 외부의 실체를 그리지 않고 영혼의 실체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의식에 의한 자동 그림과 같은 그런 미술기법들의 목적이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에 어떤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병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에 매료되었으며, 불합리하다고 여겨 왔던 것이 어쩌면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자극을 받았다. 정신병의 발작으로 소란에 휩싸였던 사람과 현실 세계와 접촉 상실의 징후가 있었던 사람은 자신들의 혼란을 대처하는 방법으로 할 수 없이 자주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소수의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가 자발적으로 만든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초기 연구자들은 환자들의 작품이 환자들을 종종 혼란시키고 있는 갈등과 관계가 있다고 평가하였으며, 심층심리학이 등장하기 전에도 일종의 정신-논리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정신분석학의 출현과 함께 정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일차 과정'(무의식적, 비논리적)의 사고가 갖는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꿈, 환상, 정신이상자의 미술 속의 이미지들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어서 감격했다.
미술치료 분야가 결과로서 발생하기까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지하수처럼 그 역할을 한 것은 임상 심리학 분야에서 ‘투사 검사’의 발달이었다. 핑거페인트는 1931년 교사 루스 쇼가 발명했을 때부터 치료뿐만 아니라 진단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미술이 사람에 대한 의미 있는 중요한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1954년 아동심리학 수업에서였다.
미술을 평가를 위한 의도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신분석을 배운 여러 분야의 임상가들이 미술을 심리치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발전이 정신건강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교육자들은 학교에서 미술에 더 자유로이 접근하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었다. 독일의 프뢰벨의 ‘유치원’과 이탈리아의 몬테소리의 ‘유아학교’에 고무된 사람들은 어린이는 더 직접적이고 스스로 참여하는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초기의 미술교육은 ‘좋은’ 작품을 모사하고 색과 데생의 기초 원리를 배우는 것을 포함하여 엄격하게 가르쳤다. 아동학의 발전과 정신분석학이 억압의 위험성과 표현의 장점을 평가하면서 사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동 미술’이라는 용어를 만든 비의 미술교사 프란츠 치첵은 아동이 느낀 그대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도록 했는데, 그 당시에는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미술치료의 탄생
나움버그와 크레이머 이 두 여성은 미국의 미술치료라는 정원에 최초로 씨를 뿌리고, 돌보고, 싹트게 하고 개화시킨 뛰어난 인물이다. 마거릿 나움버그와 이디스 크레이머는 모두 정신분석이론, 아동발달, 미술, 교육에 대한 독서와 이해로 무장한 지성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정신분석이론을 따르지만 미술치료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다르며 한 사람은 치료를, 다른 사람은 미술을 강조한다. 나움버그는 미술을 꿈처럼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상징적인 언어’의 형태로 보았으며, 항상 미술가 특유의 해석을 존중하면서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불러내게 되고 자유로운 연상을 통하여 이해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크레이머는 미술을 갈등하고 있는 감정과 충동이 미학적으로 만족할 만한 형태로 통합되고 창작 과정을 통하여 자아가 통합하는 것을 도와주는 방법인 승화로 가는 ‘왕도’라고 보았다.
나움버그는 미술치료 뿐만 아니라 미술교육의 개척자였다. 그녀는 1914년 월든이라는 정신분석학 원리에 뿌리를 둔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존 듀이와 마리아 몬테소리와 함께 공부하였다. 정신분석학의 유아에 관한 내용에 매우 감동을 받아서 월든 학교의 모든 교사들에게 정신분석을 받기를 권하기도 했다.
1947년 나움버그는 자신의 아동 연구 사례들을 모아 논문으로 만들었고, 미술치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학자답게 자신의 논문을 소개하는 데 전념했다.
또다른 이론가 이디스 크레이머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프라하를 떠난 미술가였고 미술교육에 대한 로웬펠드의 생각과 정신분석적 사고의 풍부한 자료들을 접했다. 그녀는 유럽을 떠나기 전에 가르쳤던 난민 아동들을 위한 미술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었고 뉴욕에서 미술치료사의 일에 능숙했다.
크레이머의 생각은 초기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에 대한 강조를 반영했던 나움버그의 미술치료 이론과 달랐다. 크레이머는 자아심리학을 강조하는 배경에서 정신분석 이론을 터득했다. 크레이머가 항상 보조 치료사였다는 것은 그녀가 창작 과정에 내재된 치료적 속성에 자유로이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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